2005년 04월 03일
일상물 찬가(讚歌).

한때 만화에 빠졌던 중학교 시기에는, 정신없을 정도로 서사구조가 치밀한 작품을 좋아했다. 베르세르크나 몬스터를 보며 치밀한 스토리 전개 (베르세르크는 갈수록 영 아니다만..) 에 감동하고, 프리스트의 음울한 분위기에 덜덜 떨었다. 아, 기생수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약간 잔인하고 괴기스럽기는 했지만 다 보고나면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곤 했지.
그런데 요즘은 취향이 바뀐 것 같다. 세상이 하수상해서 충격적인 소재와 스토리가 나에게 별로 어필을 못하기 때문인지, 그동안 공부를 안해서 머리가 굳었는지, 심각한 이야기를 읽기가 함들어진다. 데스노트를 보니 3권을 넘어가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가시나무왕이나 바실리스크를 볼려고 하니 간략한 스토리를 읽는 것 부터가 꺼려진다.
이러다보니 보게 되는 건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비정상적인 (물론 여성이 더 많다) 만화들 - 하렘물 - 들이다. 본인이야 하렘물을 경멸하기 보다는 '즐기는' 편이기 때문에 좋아라 하지만 가끔씩 질릴 때가 있다. 스토리 있는 건 보기가 싫고 하렘은 약간 질릴때, 나는 편안한 일상물을 찾는다.
Sally Brown : There are too many characters in this book, and too much going on.. I can't keep track of them all.
(이 책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그리고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전혀 기억할 수 없다니까.
Snoopy : (I like a book where there's only one character and nothing happens to him...)
(나는 등장인물이 하나뿐이고, 그 주인공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책이 좋더라...)
- Peanuts. Charles M. Schulz
(이 책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그리고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전혀 기억할 수 없다니까.
Snoopy : (I like a book where there's only one character and nothing happens to him...)
(나는 등장인물이 하나뿐이고, 그 주인공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책이 좋더라...)
- Peanuts. Charles M. Schulz
일상물이란 스누피가 말했던 조건에 가장 근접한 장르일 것이다. 특정한 캐릭터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추억을 담아가는,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보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사건은 한 편에 끝나고 길어봤자 두 편에 걸칠 뿐이다. 앞의 줄거리를 숙지할 이유도 없고, 3개월정도 있다가 봐도 기억속을 뒤질 일도 없다. 판타지틱한 설정도 별 필요가 없다. 있으면 복잡해질 뿐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신비한 힘을 가진다던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해도 그것은 이야기 자체를 파괴할 정도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본질은 평범한 한 사람의 소시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인공의 일상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고 그 일상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일상물은 좁지만 넓은 세계를 가진다. 마호라바에 나오는 나루타키장이나, 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의 코스모스장, 이런 특정한 공간들은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우주를 형성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상호작용하는 사건들이 우주의 구성요소다. 그 우주와 다른 우주의 구성원 - 외부인, 신 캐릭터 - 이 충돌하는 것도 재미있고, 그 반대로 우주의 구성원이 다른 우주를 경험하는 것도 일상물만의 재미이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일상을 탈출하고자 만화를 보는 것이라면, 일상물을 본다는 건 뭔가 앞뒤가 안맞는 상황일지 모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들에 일상에 매료된다는 것 자체가 일상탈출 아니겠는가? 가끔씩은 이렇게 다른 세계의 일상에 빠져드는것도 재미있다. 난 그런 일상물이 좋다.
# by | 2005/04/03 23:39 | 무규칙 이종취향 | 트랙백 | 덧글(13)








전환의 때가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리 졸라 짱쎈 투명드래곤 떼거지도, 허약하고 뭐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보통사람 한명을 못 이기는 스토리의 물건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능제강(柔能制强)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집에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고 그런..
일상이야 말로 진정한 전쟁터인데. ;_)
일상에서 일어날 만한(?) 일들을 과장해서 그려냈다고 할까... 그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던 만화입니다.
Ikarna // 독자들도 이제 질린거죠.
불꽃빅장교사 // '나는 보통사람입니다' 라고 했던 모 대통령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시대유감 // 지구를 지켜서 돈을 벌고, 그걸로 생계유지를 하는 그런... (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
도박면상 // 바꿔~바꿔~
M.RJHAN // 하하. 일상에 대한 지렁이배설물만한 사고라도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다른 건 아예 일상과 벽을 두지않습니까.
Arukei // 아리아 쵝오! ㅠ.ㅠb
카오루 // 배경은 일상인데 공격패턴(?)은 개그물이죠.
0점에 놓지않으면 측정하기 짜증나거든..[펑]
센타로의일기로 바뀌어서나오던데[...]
거 재미있게봤는데 어느날이후로못봤음;
코토네 // 대책없이 때려잡는 액션물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