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는가

- 어느 날 모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에 착안하여 써 본 소설.
- 허접한 거 나도 아니까 그냥 봐주세요. 처음입니다.
- 중반 이후부터 페이스 추락. 이걸 어째.

그는 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는가

‘지름신‘ 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충동적인 소비생활을 관장하는 21세기 도시문화의 신(神)으로, 충동구매가 있는 곳에 나타난다고 한다. 충동구매를 조장하는 것이 지름신의 능력이다. 멀쩡한 사람 앞에 갑자기 ’강림‘ 하여 DVD나 디지털카메라 같은 물품을 그의 힘으로 ’지르게‘ 하는 것이다. 생필품에는 강림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름신은 우리가 사도되고 안사도 되는, 그렇기 때문에 살까말까 고민할 때에 갑자기 나타나시어 “지르라!”고 일갈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신용카드의 일련번호와 비밀번호를 적고 결제버튼을 누르게 되어있다.

지름신의 열성교도 - 통칭 지름교도- 인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지르려 한다. 오늘 지를 대상은 Sony Play Station Portable. 통칭 PSP로 불리는 휴대용 게임기다. 나같은 지름교도가 이걸 아직까지 안 지른 이유는 단 하나, 오늘 밤 12시에 500개 한정으로 한정판이 발매되기 때문이다. 한정판은 특수 보디로 제작되어 일련번호까지 붙어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이런 한정판에 지름신이 빠질 이유가 없다. 지금 시간은 11시 정각. 아직까지는 시간이 널널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찰나의 차이로 한정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 탐색차 한정판을 파는 I홈쇼핑몰에 접속한다.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도서, 의류, 자동차, 여행 패키지까지 주문하는 이곳은 나 같은 지름교도에게는 성지나 마찬가지다. 로그인을 하기 위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는데

도저히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공통적으로 쓰는 비밀번호를 대입 해봐도 통하지 않는다. 평소에 안 쓰는 쇼핑몰 이어서인가?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서 그랬나? 설마 해킹당한 건 아니겠지? 난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시킨다. 겨우 비밀번호 하나 때문에 PSP 한정판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없다. 없다.

이럴 때를 위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는 ‘비밀번호 찾기’ 라는 기능이 있다.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입력하면 비밀번호를 이메일로 보내는 방식이다. 다행히 I사이트에도 이런 기능이 있었다. 당황한 마음을 진정하며 내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적어넣었다. 확인을 누르면 컴퓨터는 나의 주민등록번호화 이름을 서버로 보내고, 서버는 그 데이터를 비교하여 나의 비밀번호를 임의로 변경하여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로 보낼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내 눈앞에 출력된다.

s***** 님의 비밀번호가 o*****@j*****.com 으로 전송되었습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된 이상 온 정신을 집중하여 빨리 비밀번호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PSP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당장 j사이트의 주소를 치고 엔터를 친다. 내 아이디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는데

이 비밀번호 마저 내 머릿속에서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을 하드디스크라 치면, 하드에서 중요한 비밀번호를 담당하는 부분만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새 나는 첩보영화의 해커처럼, 비밀시스템에 접근하려는 것처럼 비슷한 비밀번호를 다 대입하고 있다. 그 결과는 매번 실패.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도 비밀번호 찾기 기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까처럼 주민번호와 이름을 입력하니 뭐가 나오기는 나온다.

비밀번호 찾기 힌트입니다 : 다시 태어나면 되고 싶은 것은?

무슨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어떤 때는 여자가 되고 싶고, 어떤 때는 고양이가 되고 싶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데 그런 걸 맞추라는 건가? 따지고 보면 내가 낸 문제지만 참 너무했다. 물론 여자, 고양이, ‘아무것도‘를 넣어봤지만 틀렸다며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 달리 방법이 없다. 이 철학적 선문답을 맞춰야 한다. 강아지, 눈(雪), 하늘, 바다, 팬티, 브래지어. 브래지어.

맞췄다! 내가 이런 걸 왜 했는지 궁금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다. ‘과거의 나‘와 두뇌싸움에서 이겨 비밀번호를 쟁취했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비밀번호를 어디로 보낼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핸드폰을 선택했다. 더 이상 이메일로 보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불안해서이다. 다행히 문자메세지는 정상적으로 전달되었고 이제 그 번호를 입력하고 확인을 누르면 될 뿐이다. 클릭.

오른쪽 아래에 있는 진행 바는 여전히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상태표시줄은 사이트에 접속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윽고 컴퓨터 모니터에는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라는 허무한 문구만이 떠오른다. 다른 사이트에 가봐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이 끊긴 것이다. 왜 하필 이런 때 끊기는 거야. 어쩔 수 없이 모뎀을 껏다가 다시 기동한다. 재기동하는 시간은 왜 이리 길고 황량한지. 불편하기보다는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나를 놔두고 멀리 떠나가는 그런 느낌이다.

인터넷이 끊기니 평소에 하지도 않았던 생각들이 난다. 앞으로의 장래,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해야 할 일, 공부, 토익, 공무원 시험, 국제 정치, 국내 정치, 북핵, 부동산, 교육, 물가, 카드빚, 한일전, 독도, 찌질이, 밥, 반찬, 삼라만상이 나를 관통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인터넷 접속이 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진다. 인터넷이 다시 나를 살리고 있다.

다시 J사이트로 들어간다. 이미 인증페이지는 날아갔으니, 처음부터 비밀번호 찾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까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핸드폰으로 인증코드를 받고 비밀번호를 알아낸다. 이메일을 확인하여 I쇼핑몰 사이트에서 보낸 비밀번호를 찾는다. 시간을 보니 11시 50분이 다 되간다. 다행히 예정된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남은 건 12시가 되자마자 곧바로 클릭을 하고 한정판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오후 11:59에서 오전12:00 으로 바뀌는 그 순간, 주문에서 결제까지 모든 과정을 마친다. 서버는 나를 비롯한 이용자들의 몰림을 견딜 정도로 튼튼한가 보다. 안전하게 한정판의 구매를 마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구매 몇 분전에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당황했지만 어찌어찌해서 제대로 구매를 했다. 이제 남은 건 배송되기를 기다릴 뿐. 배송을 기다리는 이 즐거움은 지름신이 주시는 축복이다. 좋지 아니한가.



"택배입니다. “

이 목소리만을 기다렸다. 문을 열고 상자를 받는다. 미리 준비한 칼로 테이프를 자른다. 똑딱이봉지 속에 고이 봉인된 나의 PSP. 전원을 켜본다. 화면에 나타나는 소니 로고와- 수십 개의 불량화소. 불량화소라기보다는 누군가 산탄을 뿌려놓았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컴퓨터를 잡고 쇼핑몰에 가서 항의를 하려 하는데

또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 생각해보니 I쇼핑몰에서 임의로 변경해준 비밀번호를 내가 바꾸지 않았다. 다시 비밀번호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왜 그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것일까. 도저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수시아 | 2005/08/23 15:40 | 무규칙 이종창작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모에수호기사 at 2005/08/23 20:22
그러고보니... 저도 네이버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군요.
고객센터에 문의하니깐... 주민등록증 스캔해서 보내라길래...
에잇! 그냥 니들이 내 개인정보 다 먹고치워라! 했더니...

그쪽에서 알아서 탈퇴시켜주더군요. (전 그냥 아무짓도 안 했는데~)
Commented by 정싸이코 at 2005/08/23 21:54
중간부분이 맘에 드는군요,
저도 뭔가 써봐야 할텐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난에러다 at 2005/08/23 22:16
'인터넷이 나를 다시 살리고 있다'는 문장이 왠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Commented by 소시민A군 at 2005/08/24 00:37
역시 간단하게 만들어놔야 합니다. 해킹은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
Commented by 참치-란지에 at 2005/08/24 09:11
나도 어떠한 책을 살려고 지각을 각오하고 집안에서 결제를 했었지만 그곳은 서버가 과부하 걸리고. 결제 완료하고 나서 학교에가 결국 수업시간 시작하기 직전 선생과 함깨 등장했었지.
왠지 저이야기 내 이야기 같아. ㅡ,ㅡa;; (PSP에대한거 말고; -ㅁ-)
Commented by ZebeL at 2005/08/24 13:42
지름신에 대항하는 거대세력이 신자들의 뇌를 점유하기 시작했습니다(어이)
Commented by mighty at 2005/08/25 06:40
다 읽고나니 허무하군요. 랄까 저런 경험이 꽤나 있었기에 [..]
Commented by 수시아 at 2005/08/25 14:06
모에수호기사 // 비밀번호 받는 이메일주소가 아예 없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정싸이코 // 그 이후부터가 난감해지죠. 역시 시작은 크게 벌렸지만 뒤가.;
난에러다 // 인터넷 나고 사람 났다- 요즘 현실이죠.
소시민A군 // 너무 쉬우면 당하기도 쉽죠.
참치-란지에 // 나도 당해본 이야기여서 쓰기 쉬웠지.;
ZebeL // 좋은 음모론?!
mighty // 다들 공감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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