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독자를 내쫒고 있다.

오래 전에 도서 대출 순위에 대해 썰을 푼 적이 있는데, 이 도서 대출 순위가 맘에 안 드는 몇몇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인 전략을 실행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학생들의 독서 풍토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 2003년부터 아동물, 음란물과 함께 통속 소설도 구입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외국소설의 득세와 한국 출판 시장. 표정훈. 문학과 사회 72호 215쪽.) 여기서 통속소설의 기준에 대해서 논하는 건 잠시 접어두자. 그들의 관점에는 도서관에서 ‘묵향’과 ‘은하영웅전설’을 보는 게 전혀 면학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공부도 안하고서 백날 묵향만 본다고 성적이 오를 리는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묵향과 은하영웅전설만 없애면,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사전을 뒤적거리며 공부라도 한단 말인가? 더 이상 학교에서 그 책을 볼 수 없을 뿐이지 볼 놈은 다 본다. 직접 사보거나, 대여점에서 빌리거나 하는 식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대놓고 MP3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놈도 있을 터이고, 공부는 뒷전이요 낮잠을 자거나 연애질에 열중하는 놈들도 있겠다. 없애나 마나 별로 바뀐 건 없는데 애꿎은 묵향과 은하영웅전설만 쳐 맞은 것이다.

이 조치는 책에 관심을 가지고픈 ‘잠재적 독자’ 를 반기기는커녕 내쫒는 행위다. 여태까지 공부만 하다가 (서울대라면 더더욱 그러겠다) 대학교에 와서 맘 편하게 책을 읽으려는 학생이, ‘자본론‘이나 ‘토마토 토익’ 같은 책만 있는 도서관에서 독서에 흥미를 붙일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통속소설이 시류에 편승하고 말초적이라 비난하더라도, 그런 책이라도 봐야 책에 흥미를 느끼고 다른 책도 읽어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쓸데없이 면학이니 엄숙함을 내세워 통속소설을 몰아내면, 무슨 책을 읽고 독서에 흥미를 붙여야 하나. 오히려 독서에 대해 반감이나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는 독서풍토를 바로잡으려다가 독서 인구를 줄이는 촌극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묵향을 읽을 자유를 허하라. 당신들은 독자를 내쫒고 있다.

by 수시아 | 2006/03/07 16:20 | 무규칙 독서일기 | 덧글(8)

Commented by 셀키네스 at 2006/03/07 16:35 #
음...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에 흥미를 갖게 하기위해 보여주는 첫 창작물이 만화책이듯이 말이지요...
Commented by 소시민A군 at 2006/03/07 17:15 #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놈만 와라!"
Commented by 桂郞 at 2006/03/07 17:47 #
그래서 홍대 앞을 밥 먹듯 자주 가는 겁니다?
Commented by Anatomist at 2006/03/08 12:46 #
도서관은 전공도서 빌려서 복사하는 곳
Commented by 時水 at 2006/03/08 12:56 #
그렇죠.
책은 음식이 아닙니다. 편식을 하면 안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읽기에도 인생은 짧거늘.
Commented by 수시아 at 2006/03/10 02:43 #
셀키네스 // 처음부터 토지를 읽힐 수는 없기에.
소시민A군 // 어짜피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桂郞 // 우리가 홍대를 가는 이유.
Anatomist // 그렇고나.
時水 // 너무 좋아하는 것만 먹어도 질립니다.
Commented by 계영배 at 2006/03/13 00:45 # x
맞는 말입니다.
통속 소설을 빌리기 위해서 오더라도 언젠가는 전공도서를 빌릴 수도 있는데...
Commented by 무명 at 2007/11/18 23:20 # x
제가다니던 고등학교는 도서관에 묵향, 비뢰도, 퇴마록 전 시리즈, 로그마스터(? 정확한제목인지는 잘;;)이 있었죠. 으음 제목이 틀릴수도있지만 아무튼 저거하고, 그냥 재미로 읽는거 반(만화책도 있었음 )/ 공부로 읽는거 반정도? 참고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입니다. 지금은 치웠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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