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비디오가게에 가다.

망한 비디오가게에 간 적이 있다.  비디오랑 만화책 몇 권을 건져볼까 해서다. 진열장에서 뭘 고를까 하다가 [벨벳 골드마인] 을 집었다. 그때 나를 지켜보던 (망한 비디오가게의)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영화보는 눈이 있네."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런 맥락이었다. 나는 뭐라 대답할지 머뭇거리다(그 와중에도 본인의 취향에 대한 근거없는 허영심을 다시 빛내며), 그 영화가 재미있기는 했는데 좀 알 수 없었다고, 나는 이런 식의 뮤지컬적인, 음악이 주(主)가 되는 영화를 좋아한다 답했다. 아저씨는 [토요일밤의 열기] [그리스] [바그다드 카페] 같은 영화를 추천해줬고, 그런 식으로 나와 아저씨는 계속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헀다. [택시 드라이버] 가 재미있었다느니, [노킹 온 해븐스 도어]의 마지막 장면이 멋졌다느니, 역시 헐리웃보다는 유럽쪽이 좋다는 식의 말이 오갔다. (그래도 영화는 내 주 취향이 아닌고로 대충대충 아는 척만 했다.)

그런 이야기를 20분정도 한 후, 나는 비디오와 만화책을 사고 가게를 나왔다. 비록 거기서 내가 원하던 [헤드윅]은 못 찾았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을 얻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 건에 내가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렇게 길게 (그것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랑) 이야기 해 본 것도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고 상대해줄 사람이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나 자신을 과묵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 말을 들어주고 대답해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서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이런 건 어때?" 하고 반응해준다면, 나는 얼마든지 수다를 떨어줄 수 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나는 3박 4일을 이야기해도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P.S. : 써놓고보니 본 포스트나 이 글이나 그게 그거같다.

by 수시아 | 2007/06/16 15:41 | 무규칙 이종취향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lastwaltz at 2007/06/16 15:55
...비슷한 맥락인 느낌이네...
결국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동류를 만났을때 느끼는 감정이라는거군..
어쩔수 없잖아;; 착각이라도 동류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느끼는건 즐거우니까;

..내가 영화관에서 맨 처음 본 영화가 택시드라이버였어;
-그것도 초등학교때-
Commented by 지벨룽겐 at 2007/06/16 15:56
대화란건 서로 관심있는 화제가 있어야 되는거죠 뭐,
Commented by 스텔스좀비 at 2007/06/16 17:39
....특히 취향이 마이너할수록 동지의 존재는 더욱더 소중해집니다.
Commented by Ikarna at 2007/06/16 18:41
제가 건전을 앞에 세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
(마이너는 마이너를 감추어 메이저와 소통한다..?)
Commented by 소시민A군 at 2007/06/16 22:32
망한 비디오가게에서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의 곽만 발견한 기억이 납니다.
그거라도 주워올걸 ;3;
Commented by 치이링 at 2007/06/17 09:22
그러고보면, 수시아님이랑 만났을때 대화는 뭔가 기억이 나진 않았는데 뭔가 즐거웠던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Anatomist at 2007/06/17 19:44
오덕오덕!!
Commented by 時水 at 2007/06/17 20:19
그때 맥주집에서 노래방 가자고 안했으면 그 가게 문닫을때까지 노가리 깠을걸
Commented by BabyNine at 2007/06/18 13:27
취향(기호) 상 과묵해질 수 밖에 (혹은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 뭐 그런 식.
하지만 별로 내세울 공통점이 없더라도 수시아씨 말대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면 대화가 즐거운 경우도 많겠죠.
Commented by 레이나드 at 2007/06/18 19:47
팀의 체력을 책임진다 인간성기사 뿌뿌뽕!
요즘 대세는 뿌뿌킹 레이드.... 막강 드웝여캐, 트롤남캐, 인간대머리남캐의 간지
가 줄줄...
수시아씨도 기회되면 전에 폭풍저그의 우울처럼 뿌뿌뽕 패러디 하나 만들어보심이...?
Commented by 수호기사 at 2007/06/19 02:34
저의 지식은 얕기에....ㅠㅠ
그래도 야애니로는 3일 4박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
Commented by 수시아 at 2007/06/22 21:22
lastwaltz // 택시 드라이버라니. -_-;
그야말로 트래비스가 여자 데리고 성인영화관 간 격.
지벨룽겐 // 바로 그겁니다.
스텔스좀비 // 동지여-!
Ikarna // 에에;; 그건 좀?
소시민A군 // 구할 수 있을 때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치이링 // 저도 기억은 안나는데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Anatomist // 십덕십덕!
時水 // 그런데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서 노래방 가자고 발광했어. 미안.
BabyNine // 그런 피드백을 더 자주 하고 싶습니다.
레이나드 // 동영상 주문까지 하시는군요. -0- 이번엔 귀찮아서 패스.
수호기사 // 것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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